나의 현재 소망은 불로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꼭 이 소망이 오늘 사이드 프로젝트 DB 모델링을 하기 싫어서 갑자기 생각하게 된 공상은 아니다. 작년부터 계속 불로불사에 대한 상상과 생각을 끊임없이 해왔다. 꼭 불로불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명이 4,5천 년은 됐으면 좋겠다. 그럼 당장 내일 있을 사내 스터디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될텐데.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도 얻을 수 없는 소망이라 아쉽다.(그래도 가끔 기도한다.) 뭐 교회에서는 예수와 함께 하면 천국에서 그와 함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 말하지만 그 약속이 난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난 아직 이 지구가 좋다.

20대에는 마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시간을 썼다. 하지만 29살 쯤 체감상 시간을 소비하는 속도가 정말 말도 안되게 빨라졌고 벌써 30대가 다 끝나간다. 이상하다 시간은 그냥 매 초 조금씩 소비가 되고 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 같을까. 아마 늙어가는 것과는 반대로 욕망이 점점 구체화 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시간은 그저 관념적인 것에 불가하지만 물리적으로 신체는 늙어가고 환경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마냥 자위할 수 없다. 아마 시간을 저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이것을 하고 싶지 않고 저 뒤 몇 백년 뒤로 미루고 싶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정말 싫고 그냥 나가서 신나게 놀고 싶다. 사업 구상이고 뭐고 그냥 몇 백년 뒤로 미뤘다가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은 겨우 80세 밖에 되지 않는다. 말이 80세지 정말 몇 십년 안된다. 그래서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 와중에 뭔가를 해야한다면 그래도 그냥 덧없이 살다 죽고 싶지는 않다.

시간은 내 의지와 관계 없이 그냥 소비하게 된다. 검소하게 쓸 수도 없고 흥청망청 쓸 수도 없다. 그냥 일정 양이 조금씩 사용된다. 가장 아쉬운게 시간을 저축할 수 없다는게 가장 아쉽다. 내가 원할 때 조금 꺼내서 쓰고 원하지 않을 때 저축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어 애가 탄다. 애가 타는 마음을 몇 사람에게 털어놨다. 한 사람은 목사님인데 "이미 영생을 얻었잖아."라며 농담조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바라는 영생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나는 빨리 죽고 싶은데."라고 이야기를 했다. 자녀만 아니면 세상을 뜨고 싶다고 해 조금 놀랬다. 나는 실재로 그 순간이 다가오면 후회가 가득해서 죽고싶지 않을꺼라 했지만 그녀는 왠지 단호했다. 삶에 미련이 없을 만큼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은 "나도 그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들어 생각하는 건 하루를 충분히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어요."라고 답을 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는 있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른 것 같다. 영생을 모든 사람이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자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 - 장편소설쓰기'라는 챕터에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그를 지속적으로 쓰게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전까지 내가 계획한 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하루를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이렇게 살다간 그냥 이대로 죽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그냥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하루를 시작했다. 내 계획 따위야 어찌됬든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다. 대신 잠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하고 달리기를 하고 사람을 만나 놀았다. 그냥 그게 다다. 이력서가 거의 80개정도 거절 당했을 때 태국 한달 살기를 하러 간다는 지인이 있었다. 가고 싶었기 때문에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가고자 결심하게 된 계기는 어느 특강에서 약간 짜투리 시간에 회사에서 질문을 할 때 '비동기적으로 질문해라'라는 (우스게 소리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삶도 비동기적으로 살자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그래 일단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요청을 보내고 응답이 올때까지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가기 일주일 전에 이력서 10개를 더 냈다. 태국에서 3번의 면접을 보았다. 기술 면접도 있어서 오후에는 놀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스타벅스로 향했다. 그리고 오후에 6시까지 놀고 다시 스타벅스에서 마감시간까지 있다가 집에와서 잠을 잤다.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만족한다. 그때 나는 일정한 루틴을 가지고 매일 그 삶을 반복해서 살았다. 욕망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태국이든 한국이든 내 집이든 카페든 도서관이든 장소는 관계 없었다. 내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개발을 공부하는 자리다. 그게 나의 욕망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셀리 케이건)의 책을 보면 영원한 삶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그는 영원히 사는 것은 저주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삶이 박탈당한다고 하여 죽음이 나쁜것은 아니며, 영원히 살면서 삶의 목적, 쾌락을 변경해가며 추구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10년전 나와 1000년전 내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인류가 유한함 그 외에는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정말 나에게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삶을 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목적과 방향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게 될 것 같다. 일단 연금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아서 좋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끝없이 일을 해야하기에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영원히 산다는 것을 숨기는 것도 상당히 피곤할 것 같다. 이래 저래 삶과 죽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하고 늘어놓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러나 저러나 인간이다. 어떤 미친 과학자가 세계의 모든 인류를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지 않는 한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을 사는 연습을 계속 하기 위해서 책상 위에 앉아서 끙끙대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연습을 계속 하다보면 어느덧 죽음이 가까워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