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소그룹에서 책 나눔을 하는데 그룹원 A가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A는 직장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직종과 환경이 달라 차마 말을 건내지 못하고 그냥 들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게 어이가 없기도 했고 분노가 일었지만 분노의 대상이 앞에 없는데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마음 상한 사람을 더 힘들게 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회 자정 능력이 떨어지니까 계속해서 이런 악습들을 타파하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 그러나 법은 한계가 명확하고 종국엔 착한 사람이 계속 희생된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의자를 팔았다. 회사 들어와서 처음 받은 성과금으로 샀던 의자였다. 그러나 내 신체와 맞지 않아 앉아 있는 것이 고통이었다. 과거였다면 계속 앉아야만 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상한 곳에서 끈기를 요구하니까. 그때 척추가 휘어진 아이들에 대한 뉴스가 있었다. 학교에선 똑바로 앉으라는 둥 어쩌라는 둥 해결책이 되지 않을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그래도 사회에서 엘리트라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문계, 인서울이 아니면 인생 말할 것처럼 윽박지르던 인간들)의 해결책이었다. 어차피 공교육이라는 것은 개인의 무엇에 맞춰주지 않는다. 그냥 전체의 방향에 따라야한다.

고등학교 때 항상 의자가 말성이었지만 아빠 엄마는 내 의자를 바꿔주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의 의자가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정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동생과 나의 의자는 똑같은 모델이었지만 둘다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결국 동생은 부모님을 잘 설득해서 의자를 바꿨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말 없이 바뀌어있는 동생의 의자를 보고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겼다. 나중에 군대를 갔을 때 아빠가 내 방을 썼는데 의자에 앉아보고는 나에게 의자를 바꾸라고 먼저 권유를 했다. 나는 '놔둬요.'라는 짤막한 말 한마디로 오기를 표현했다. 나에게 이상한 곳에서 끈기를 요구한 부모님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었다. 이상한 끈기를 요구하는 것은 학교와 직장과 심지어 인간 관계에도 만연해있다.

나는 정말 극도로 예민해서 왠만한 것에 마음이 차지 않는다. 하지만 항상 사람들은 나의 예민함을 '사회화가 덜 된'것으로 표현했다. 그래 아마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또 알게 모르게 오기가 생긴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들의 요구는 항상 간단하다. 자신의 억지에 동의해달라는 것이다. 그걸 소위 '사회화가 덜 된' 나에게 항상 강요해왔다. 하지만 나는 항상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처음엔 분노를 품고 달려들어 말을 쏟아냈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개 짖는 소리에 사람이 반응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대응해왔다. 한번은 나랑 친했던(지금은 아닌) 지인이 나에게 억지를 강요했다. 내가 아무 말을 안하자 왜 아무 말도 안하냐며 화를 냈다. 그래서 나는 "형, 내가 저번에 말했지. 개 짖는 소리에 사람이 반응한다 안한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후로는 나에게 자기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말이 안통하는 사람과 싸우지도 않는다. 대화는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많다. 내가 대학 3학년이 될 무렵 한국 사회에는 압박 면접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하지만 그 일화를 들어보면 정말 가관이었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세가지 선택이 있었다. 도망가던가 혁명가가 되던가 자살을 하던가. 나는 도망 가는 것을 선택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나에게 '철이 없다.'고 비난을 했다. 그러던가 말던가 나는 듣지 않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다 부모님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감사합니다.) 친구들이 왜 취업을 하지 않느냐며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압박 면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생존권을 쥐고서 사람을 저렇게 막대하면 차라리 굶어 죽는게 낫다.'라는 취지로 이야기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때는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정의로운척은 하지만 비겁자일 뿐이었다. 항상 도망다녔다.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압박 면접은 재평가되고 있다.(안좋은 쪽으로) 시대가 일찍 바뀌어준 덕분에 나는 취업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맞선 자들의 피값으로 나는 혜택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전주서 살때 독서 모임을 했었다.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설속 인물들은 결코 통상화 되선 안되는 사회의 악습에 소심하게 맞선다. 남들이 모르게 그 일을 한다. 자신밖에 모르는 사회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세상이 바뀔까? 아니 그들은 그냥 사회에 반격하는 것이다. 그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나도 사회에 반격을 하고 싶었다. 그땐 백수라 뭘 할 수 있을까 밖을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 관찰을 했다. 그러다 사람들이 편의점 알바생과 버스 기사, 식당 종업원,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결코 인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사회에 반격을 했다. 정말 오랫동안 내 가설이 틀린게 아닐까 관찰하고 또 관찰했지만 이 사람들의 친절에 친절로 대하는 사람은 백에 한번 꼴이었다. 나는 여전히 계속해서 반격을 가하고 있다. 누가 알아주냐고? '알빠냐!'

의자를 팔 때 당근으로 팔았다. 당근은 중고 거래 플랫폼이긴 하지만 기업이 내걸고 있는 가치는 요약하자면 '좋은 지역 사회 만들기'[1]다. 내가 대학 인문학 시간에 매료됐던 가치를 누군가는 기술로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거 하나에 매료되서 이력서를 넣었던 기억이있다.(광탈했다.) '사회가 이러니까 난 안할꺼야!'라며 소리쳤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면 그것을 무엇이라 정의 해야하는가. 그건 그냥 죄책감과 연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정말 용기가 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도 시도하는 것이 용기다. 나의 세계에서 알을 깨고 나오기 시도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엿같다고 하는 그 사회에서 용기를 내서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부터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체질을 변화시켰다.

술 자리에서 적자생존이란 말을 많이 한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라 말하며 버티자는 격려 아닌 격려다. 마지막에도 살아 남은 놈이 강자다. 그래서인지 살아 남기 위해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원하는 것 같다. 공존보다 생존이 우선시되는 것이 오늘 날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그냥 생존자가 되기 위해 하루 하루 버티는 것 뿐 특별한 건 없다. 그러나 정말 살아 남는 놈이 강한 것이라면 다함께 살아남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꼭 나 혼자만 살아남을 필요가 있나. 공존을 모색하면 우리는 강해질 수 있다. 직장 동료에게 그것도 모르냐며 틱틱거리며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존재가 더 나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심한 말을 내뱉을 필요도 없다. 부하 직원을 심한 말로 괴롭히거나 일에서 배제시킬 필요도 없다. 불편함을 대화로 해결하라고 언어가 있고 입구녕이 달려있는 것이다. 대화가 필요없으면 침팬지처럼 입 크게 벌리고 가슴 두드리면서 상대방에게 달려들면 된다. 나는 그런 야만 사회에서 생존자 A로 불리우고 싶지 않다. 그냥 살아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